밀리의 서재를 뒤적이다가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급류'라는 단어. 낯설고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문득, 마음이 복잡했던 날의 기분과 딱 어울리는 제목 같아서 아무 생각 없이 펼쳤다.
그렇게 나는 이 소설에 휩쓸렸다.
급류는 무섭다. 빠르다. 그리고 빠져든 자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
누군가의 삶이 물살에 휘말리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허우적거리며 물을 삼키는 사이, 중심을 잃고 아래로 끌려가는 사람. 정대건의 소설 '급류'는 그런 이야기다. 어떤 사랑은, 어떤 상처는,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휘감고 흘러간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나서,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잔잔한 물 위에 던져진 돌멩이 하나가 수면 아래 깊은 진실을 건드린 것처럼, 내 마음도 오래도록 잔상이 남았다.
한여름, 두 구의 시신으로부터
도입부는 강렬하다. 진평강 하류에서 두 남녀의 시신이 발견된다. 한 명은 지역 구조대 반장이고, 다른 한 명은 동네 미용실 주인이다. 그들의 시신은 엉켜 있었고, 얼굴을 뒤덮은 다슬기가 부패를 증명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불륜이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치정이라 말한다. 진실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이 죽음이 사건인지, 사고인지, 혹은 자살인지.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죽음이 남긴 파문은 단순한 두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파문 속에서, 남겨진 자들이 살아간다.
도담과 해솔, 남겨진 아이들
등장인물은 단순하다. 도담은 아버지를 잃었고, 해솔은 어머니를 잃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평범한 고등학생이 아니다. 추문의 중심이 된 가족,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시선 속에 홀로 남겨진 아이들이다.
도담은 병든 어머니와 함께 마을에 남아야 했고, 해솔은 도시의 할머니 집으로 보내진다. 둘 사이에는 분명히 있었던 감정이 있었고, 애틋함이 있었고, 썸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한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부모의 죽음 이후, 그 감정은 차마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 된다.
사랑은 죄일까.
용서는 진실을 부정하는 걸까.
상처는 상처끼리 맞닿을 때 비로소 아물 수 있는 걸까.
나는 책을 덮고 나서도 이 질문들을 곱씹었다.
이 소설은 피폐물이 아니다
누군가는 이 소설을 웹소설 장르에 빗대어 '순한 맛 피폐물'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 이건 장르가 아니다. 이건 더 깊고, 더 아픈 이야기다.
이 소설은 말 그대로 급류다.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는, 누구나 떠내려갈 수밖에 없는 감정의 흐름이다. 상처를 품은 채 살아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물처럼 잔잔하게, 그러나 잔인하게 흘러간다.
이 소설의 아름다움은 과장되지 않은 현실성에 있다. 사랑은 찬란하지 않다. 이기적이고, 어설프고, 때론 폭력적이다. 그것을 끝내 짊어지고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이 소설을 사랑스럽게 만든다.
다시 만난 우리는 사랑일까, 연민일까
도담과 해솔은 어른이 되고, 우연히 재회한다. 세월은 흘렀고, 상처는 남아 있다. 서로를 향한 감정이 여전히 남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들이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이유가 사랑인지, 아니면 연민인지도 불확실하다.
나는 그 불확실함이 좋았다. 사랑이란 애초에 명확한 감정이 아니니까.
그리고 어떤 감정은 이름 붙여지는 순간, 오히려 작아지기도 하니까.
이 소설은 감정의 이름을 규정하지 않는다. 다만 인물들이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감정을 끌어안고 살아가도록 만든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프고, 충분히 아름답다.
마지막으로
'급류'는 불륜의 이야기도, 연애의 이야기만도 아니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나는 이 소설을 통해 하나의 문장을 떠올렸다.
사랑은 용서가 아니라, 포기의 기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붙잡고 싶은 감정이 있다면, 그건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고 나면 오래도록 잔상이 남는다.
그건 이야기의 무게가 아니라, 이야기 속의 침묵 때문이다.
'급류'는 소리 없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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